조선의 甲富 金謹行은 동이면 석탄리 효자 金相基의 선대조(先代祖)
 옥천사랑
 2018-12-19 15:26:52  |   조회: 2388
첨부파일 : -
校洞宅 金政丞은 金政丞의 後孫 (孝子 金相基 系譜)

金時興의 8世 金智-孝信-仲-守良-有光-福長-得祺-順嬪金氏(順和君 李珹의 母),金愼行.金謹行
김근행(金謹行), 1610년 ~1678년 이후)은 조선 후기의 역관으로 왜어 역관을 지냈다. 본관: 김해
가족 관계[편집]
종고조부@: 김수강(金守綱)
종고조부@: 김수현(金守賢)
친고조부@: 김수량(金守良)
증조부@: 김유광(金有光)
종조부@: 김복수(金福壽) 당숙@: 김서강(金瑞剛)
종조부@: 김복룡(金福龍) 당숙@: 김응수(金應壽)
종조부@: 김응부(金應副) 당숙@: 김윤신(金胤信)
종조부@: 김응명(金應命) 당숙@: 김준남(金俊南)
친조부@: 김복장(金福長)
친조모@: 평산 신씨(平山 申氏) 고모@: 순빈
고숙@: 선조
아버지@: 김득기(金得祺)
어머니@: 신수응(申應秀)의 딸 - 평산신씨(平山 申氏) 형님@: 김신행(金愼行)
부인@: 김씨(全州 金氏)
장인@: 김의인(金義仁) - 전주김씨(全州金氏)
외조부@: 신응수(申應秀) - 평산신씨(平山申氏)

金愼行 등을 愼差(개선)하기를 청하는 承文院의 啓.

金智 大司成의 7世孫 金應壽[1567~1592년] 贈 領議政

金時興의 8世 金智- 孝信-仲-守良-有光-福龍 -應壽(贈 領議政)-夢祥- 繼賢-孝建-英遜-符龜 -順億-輔楠-命祥-時載-漢鳳-天籌- -禮燮-基世-躔鍾-淳幸-培植-炳天

8世金智-孝溫-三海-璨-海棠-鏺-饉思 , 謹守-壽萬-爾鏡-光淵-相守-有煥-致重-得鍊-尙淳-秉中-載烈-喜天-宗欽-永守-大休.

8世 金智-孝溫-三漢-0-0-0-豊-南-英立--命坦-義弼-相采-德喆-復升-奎文-慶元-榮澤-東禹
-相文-仁喆-逵升-奎錫-慶寶-巖澤-東熙-

金時興 2世-尙 3世-克稅 4世-重源,5世 峴- 6世-光儲,-7世-順, 8世 金觀一名(寬)-金文起 -玄錫-繼勳-自鎔-禧年-陽鳳-德年-儀鳳-希寧

김문기(金文起)는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3족을 멸하는 위기를 당했다,김녕김씨 충의공 백촌 김문기 선생 선산 추정지 옥천(沃川)에서 발견 고려문하 시랑 김현(金峴). 조선조 호조판서 김순(金順 :묘-영동군 심천면), 공조 판서 김문기. 김현(金峴)의 손자인 김순(金順)이 충북 옥천(沃川)의 산수(山水)에 반해 그곳에 자리잡은 뒤, 일부 자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金文起의 아버지 金觀(관) 一名(일명) 寬(관) 配(배) : 貞敬夫人(정경부인) 管城(관성) 陸氏(육씨)墓(묘) 永同郡(영동군) 深川面(심천면) 明川里(명천리) 텃골 卯左(묘좌) 金文起의 아들 金玄錫, 아들 효자 김충주(金忠柱), 손자 김경남(金景南), 증손자 김약전(金約前) 金忠立(상주관노로정속) 의 아들 金明之 옥천에서 김천시 구성면 상거리로 이주.김명지(金明之) : 은암공의 조부모이신 김명지공의 묘는 단종사화 이후 300년동안 실전되어 오다가 옥천 향토사학자 이수암 선생님의 도움으로 충북 영동 오정저수지 관리사무소 머리 위쪽 산의 절벽 근처에서 가족묘 6기를 포함하여 총 11기의 실전된 묘를 발견,단종사화(계유정난1453년)때 옥천으로 金明之 분묘 : 옥천 죽항촌 후곡 김명지의 아들 김영년(金永年1546, 1 ~ 1597)의병장, 옥천에서 태어났다.
金文起 -玄錫-繼勳-自鎔-禧年-陽鳳(1537년-)
-德年-儀鳳-希寧
김희년(金禧年) (1534~1592) 字 景老
조선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김자용(金自鎔)의 아들이고, 조식(曺植)의 문인(門人).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어 통례(通禮)를 지냄.
김녕인 백촌 문기의 후손이다. 서기1534년에 갑오방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淸風과 沃川 兩 郡守를 지냈다.

金智 大司成의 7世孫 金應壽[1567~1592년] 贈 領議政
金時興의 8세 김지공(智公)의 6세손(世孫) 복용(福龍)의 손자(孫子) 응수應壽의 아드님
金文起 -玄錫-繼勳-自鎔-禧年-陽鳳(1537년-) -德年-儀鳳-希寧
김희년(金禧年) (1534~1592) 字 景老 조선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김자용(金自鎔)의 아들이고,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어 통례(通禮)를 지냄.

金寧金氏 8世 金智 大司成公派의10世 또는 13世孫 金光範의 아들 金相基 字 汝進 號 度齋. 1805년 10월 23일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지석리) 출생1890년~85세로 사망, 묘: 석탄리(지석리) 오봉산효자비, 김녕김씨 재실,고종43년(1904년) 孝子嘉善大夫, 之中樞府事,龍 衛副護軍 金相基之閭 세움,


[진사] 철종(哲宗) 3년(18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9위(49/100)
김필환(金弼煥) 자(字) 사장(士章)
생년: 병술(丙戌)1826년(순조 26)
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옥천(沃川)
전력: 유학(幼學)
답안: 사마시소 이시(二詩)
부모구존: 중시하(重侍下)
[부(父)]
성명 : 김상기(金相基) 관직 : 유학(幼學)
[안항(鴈行)]
제(弟) : 김경환(金景煥) 제(弟) : 김석환(金奭煥)
숭정기원후4임자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壬子式司馬榜目)』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년)에 김녕으로 확정.
* 계유정난과 사육신(단종복위)로 김녕김씨는 오랫동안 본관을 김해로 삼다가 1970년대 초 김녕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땅을 밟지 않으면 길을 오갈 수 없었다. 궁궐같은 집안에서 일하는 머슴들만 해도 100여 명은 되었고, 소작농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김정승은 옥천의 내노라하는 사대부였다.

조정을 드나들 정도의 벼슬을 얻었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가득했다. 그래서 99칸의 한옥을 지을 수 있었다. 집 주인이 머무는 안채를 중심으로 위채, 아래채, 사랑채, 정자, 연못, 사당 등을 지었다. 한옥에서 한 칸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 한다. 김정승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탐관오리로 낙인찍히면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김근행(金謹行
1627년(인조 5년) 왜학 역관 취재에 합격하여 관직은 사역원교회(司譯院敎誨)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다. 1630년대부터 대마도에 파견되는 문위행의 통역관으로 다녀왔고, 1643년과 1655년에는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 본토를 다녀왔으며, 1663년에는 직접 문위행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다녀왔다.

그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않고 일부러 질이 낮은 관대와 관복, 호패, 패도 등을 사용했다. 인조대부터 현종대까지 대마도와 일본과의 무역 활동, 훈련도감과 병조의 부탁으로 여러 번 화약과 유황, 조총 등을 반입해오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또한 고리대금을 하여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1676년의 부산 초량왜관 신축공사에 투입된 일본인과 대마도인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할 수 없자, 단기 고리대금으로 이자를 남겨 그 이자로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하였다.

왜학 역관으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한양의 이름있는 갑부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검소히 행동하였다. 현명하기로도 이름났다.

17세기 조선을 뒤흔든 일본행 무기 밀매 사건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역관 김득기(金得祺)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신응수(申應秀)의 딸이며, 고모 중 한 명은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였다. 아버지 김득기는 역관으로 사역원 교회를 거쳐 당상관인 첨지(僉知)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김득기는 역관과 조선시대 외교 비사인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등재될 정도로 이름 있는 역관이었다. 아버지 김득기는 1592년(선조 25)에 명나라에 청병 사신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어 가서 선조가 피난해 있던 평양으로 귀환하여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행한 공로로 호군(護軍)에 특배되었으며, 선조가 명나라에 귀순할 뜻을 비치자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불가함을 힘써 간쟁하였다. 또한 조천사로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받아오는 은화(銀貨)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아버지 김득기는 1604년(선조 37)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왜학(倭學) 역관 취재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어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역관 생활[편집]

그 뒤 김근행은 부산의 왜관 건물의 개·증축 등 수리공사를 담당하는 왜관 감동역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사역원 왜학훈도로 왜학 통역관을 길러냈다. 또한 그는 대마도 도주(對馬島 都主)의 애경사(哀慶事)를 위로 및 축하하는 목적에서 파견되는 문위행의 역관으로 여러 번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1640년(인조 18)에 문위행(問慰行)의 당하역관으로 파견된 이후 문위행의 수행원으로 7회를 대마도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1633년 훈련도감에서 청나라의 눈을 피해 유황과 무기의 밀수를 추진하였는데, 김근행이 그 일을 맡아서 일본으로 들어가 밀매 상인과 접촉하여 유황 4만근을 조선으로 밀수, 반입하였다. 이 공로로 후일 그는 당상역관을 거쳐 가선대부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통신사의 상통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사역원교회를 거쳐 당상관에 올라 1655년(효종 6) 통신사가 파견될 때는 당상역관으로도 파견되었다. 효종 때에도 문위행의 통역관과 문위행으로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이때는 청나라의 눈을 피해 북벌에 쓸 무기를 구입해 왔다.

유황 밀무역 주도[편집]

1663년 대마도에 문위행으로 다녀왔다. 1663년에는 당시 좌의정 원두표, 훈련대장 이완, 한성부우윤 유혁연 등으로부터 유황 수입을 권유받았다. 이들의 권고로 김근행은 1663년 문위행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어 일본인 잠상과 수입을 약속하고, 1664년 3월 귀환하였다. 1644년 2월에 일본인 세 명이 유황 20,000근과 장검 200자루가 대마도로부터 왔다. 이 때 일본인과 무역하여 유황과 장검을 사들인 것은 서울의 부상(富商)인 이응상(李應祥)의 노복이었다. 이응상은 이미 1663년 가을에 훈련대장 이완의 제의로 유황 1만4천 여 근을 훈련도감과 어영청에 각각 납입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북벌에 쓸 화포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는 유황과 총기류 수입을 주도했다. 당시 유황 수입을 주선한 사람은 김근행과 그 외에도 이응상, 임무상(林茂祥), 부산진 군관 박명천(朴命天) 등이었고, 역관으로는 그 외에도 한시열(韓時說), 상인으로는 방이공(方以恭), 김덕생(金德生)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자기의 자본으로 유황 100근당 은 70냥으로 계산하여 유황과 총기류를 수입하였다.

1664년에도 그는 문위행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다녀왔다. 이때 김근행의 노력으로 1664년 여름에 석류황 1만 2천근, 흑각, 포탄, 유황, 화약, 긴 조총, 장검 등 군수품을 다시 대마도로부터 수입해왔다. 이후로도 그는 조정의 명을 받아 화포와 총기류를 대마도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다. 1665년 7월에는 김근행이 주선하여 상인 임지죽(林之竹)은 유황을 수입하였다. 이때 그는 수입 과정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외에도 유황 등 같은 군수품의 수입은 역관이 사행으로 파견되었을 때 무역을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상인이 물화를 가지고 오면 특정 상인이 수입하여 군문에 납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청나라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상인과 다른 역관, 개인 등을 통해 유황과 총기류를 수입하여 의정부와 비변사, 병조에 비밀리에 바쳤다. 그는 1663년과 1664년 연속으로 문위행으로 다녀오면서 유황과 무기류 구입에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김근행은 1676년 초량왜관의 건립 비용을 고리대로 마련하였다. 조정에서 내린 자금으로 공사하다가, 자신의 사재를 투입하고도 비용이 부족하다고 본 그는 박재흥과 함께 만 냥을 빌려서 고리대하여 6천 냥의 이익을 얻어 초량왜관 건립비용에 추가로 투입시켰던 것이다. 김근행은 변승업 등 다른 역관들처럼 자기 자본으로 고리대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 1678년 일부 파손된 초량왜관을 신축할 때에 동원된 대마도와 일본인 목수들의 임금으로 지급할 비용이 부족하였다. 이때 비용 부족으로 문제가 될 뻔했으나 그는 신속하게 역관 김진하(金振夏), 박재여(朴再興), 박유년(朴有年), 홍우재(洪禹載) 등과 함께 영남 민결 5,000냥을 빌려 이것으로 고리대금을 하여 이자를 마련, 이 이자로 일본인 목수들의 임금을 마련, 지급하여 사태의 악화를 막았다.,

그는 왜학역관과 훈도로 오랫동안 왜관에 머물렀고, 효종 이후에는 문위행으로 여덟 차례 대마도에 다녀왔다. 그 뒤 종2품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김근행은 재산이 많고 품계가 높은 역관인데도 검소한 생활로 매사에 조심하여 현명하였다고 한다.

당상관이 되면 망건에 금관자를 착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찢어진 갓에 붉은 구리를 칠한 망건 관자를 썼으며, 관복은 일부러 쇠뿔과 나무로 된 관대와 장식을 썼다. 또한 고급 비단이 아닌 보통의 비단으로 관복을 해 입었다. 또한 금대는 쇠뿔로 된 것만을 사용하고 황금색을 칠했으며, 패도의 자루나 호패는 일부러 나무로 만들어 썼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러게 답했다 한다.

“ 내 물건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면 양반 귀족 자제들이 모두 갖고 싶어 할 것이다. 만일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 인심을 잃게 될 것이고, 강제로 빼앗기거나 도둑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루 나눠 주자면 한이 없다. 무릇 사치와 자랑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

그는 부자로서도 이름이 났으나 항상 거친 베로 지은 의복에 헤어진 갓을 쓰고, 관자 또한 붉은 구리에 금칠한 것이고, 금대(金帶)는 쇠뿔로써 누런 빛이 나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차고 다니는 칼은 나무로써 자루를 만들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더러 좋고 아름다우면 귀한 집 자제가 모두 갖고 싶어하는데 주지 않으면 그들의 환심을 잃을 것이고, 주려면 두루 줄 수 없으니 사치한 것은 재앙과 화를 가져오는 원인이라 하였다. 그는 자손들에게도 사치하지 말 것과 소중한 물건을 자랑하지 말 것을 늘 충고하였다. 자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보고 부러워하거나 욕심을 부리게 될 것이고, 이것이 너희에게 화가 되는 지름길이니 있어도 없는 듯 하라고 항상 교훈하였다.


김근행(金謹行)이 사위의 벌을 청한 사연
조선의 큰 갑부이자 역관으로 높은 벼슬을 한 김근행(金謹行)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 딸을 곱게 길러 시집을 보냈는데, 사위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새로 집을 하나 지었다.

새집의 집터는 넓고 한적했으며, 건물이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당시에 호화 주택으로 손꼽힐 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구경하러 갔고, 자연히 집이 좋다고 소문도 많이 났다.그러던 어느 날, 어느 조정의 높은 고관이 길을 가다가 그 집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고관이 보기에도 그 집은 너무나 한적하고 격조가 있어서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갑자기 그 집이 탐이 난 대감은 아랫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알아보도록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알아보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대감에게“그 집은 역관 김근행의 사위의 신혼집입니다.” 라고 고하였다.대감은 평소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김근행의 사위 집이라는 말에 반색을 하고, 김근행의 사위에게 연통을 넣었다.

자신이 조정에서 물러나면 그 집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다며, 그 집을 빌리자고 전한 것이다. 대감은 당연히 김근행의 사위가 자신의 청을 순순히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위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아직 나이 어린 김근행의 사위는 장인의 돈과 세력을 믿고 그 고관의 청을 시큰둥하게 여기고 한마디로 거절한 것이다.

“신혼 살림을 꾸미자고 지은 새 집을 양반의 자세(藉勢)로 뺏으려 들겠단 말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이 말을 전해들은 고관은 크게 노해서 그 사위를 형조에 고발했다.“역관 아무개의 사위는 제 처지도 모르고 사대부를 능멸하여 말버릇이 없었으니 그 죄가 크다.

또 하나 중인 주제에 집이 너무 사치하고 칸수의 제한에도 넘쳤으며, 솟을 대문과 두리기둥(圓柱)을 썼으니, 그 참람한 죄가 크다.”다음 날, 해가 미처 다 얼굴을 내밀지도 못한 새벽 바람에 김근행(金謹行)이 당시(현종 5년)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의 집을 찾아가서 급히 뵙자고 했다.“서리 아침에 무슨 급한 일일까?.

”정지화는 장안 갑부인 원로 역관의 면회 신청 명함을 보고 얼른 맞이 했다.“소인의 비천한 사위 놈이 죄를 지어서 형조에 갇히게 되었나이다.”“죄목이 무엇이오?.”필시 죄를 가볍게 다스려 달라고 간청하러 온 줄 알고 판서는 마땅찮게 여겼다.

“죄목이 무엇인지 상관 마시고, 원컨대 형조에서 소인의 사위놈에게 좀 단단히 매질해 주십시오. 비록 피를 보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나이다.”“사위가 그토록 미웠소?. 어이 그런 청을 다 하시오?.”의아스러워 형조 판서가 묻자 김근행(金謹行)은 정색을 했다.“소인은 부유하다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사위놈이 제대로 무거운 곤장을 맞지않으면, 장차 대감께서 소인에게 매수되었다는 구설을 듣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면 그 누가 대감에게 돌아갈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형조 판서는 몹시 불쾌한 듯 노기를 띠고 김근행(金謹行)을 나무랐다.“내가 처리하는 공사(公事)가 그리 녹녹하다고 여기시오!!

어서 돌아가시오!!”형조 판서의 노기 어린 호통에 김근행은 송구한 듯 머뭇거리다가 다시 사위를 호되게 다뤄줄 것을 거듭 간청했다.“소인의 사위가 가벼운 벌로 풀려난다면 그 고관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차 더 큰 죄목으로 다른 벌을 받게 될 것이옵니다.

”김근행(金謹行)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머리를 수그리고 오랫동안 빌고 빌었다.이와 같이 김근행은 이재(理財)에 못 지 않게 처세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김근행의 그런 행동을 감탄해 마지 않았다. 김근행(金謹行)이 처신이 조심스러웠던 것은 오랫동안 벼슬길에서 터득한 체험에다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는 그의 천성이 어우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근행(金謹行)이 곤욕(困辱)을 치른 사연

김근행은 큰 갑부인데다가 조정에서도 높은 품계를 가진 역관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성품이 아무리 온화하고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도 어쩔 수 없이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데다가, 그가 중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보다 더 많은 재산에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을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한번은 현종 6년(1665)년 있었던 일이다.

그해 5월, 김근행은 사행길을 따라갔다. 그는 유능한 역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사행길에 따라갈 기회가 꽤 많은 편이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포교들이 그의 짐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이들은 무언가를 발견했고, 바로 김근행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다. 김근행은 유황을 밀무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 임금은 당시 형조 판서였던 김좌명(金佐明)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역관 김근행이 유황을 밀무역했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예, 그의 짐에서 유황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수량이 얼마나 되오?”

“전에는 1만 5천 근이었는데, 지금은 2만 7천 근이나 되옵니다.”

“무어라? 그리도 많단 말인가?”

임금은 꽤 놀란 듯했다. 그리고 순간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나서서 아뢰었다.

“전하, 이 일은 관노가 면천(免賤)의 특전을 얻으려고 꺼낸 계책이옵니다. 그 관노는 자신이 김근행을 고발하면 면천을 할 수 있을 줄 알고 관에 고발한 것입니다. 헌데, 김근행은 밀무역을 한 것이 아니라 비변사의 밀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김근행이 가지고 들어온 유황은 본래 인조대왕 때부터 정승 원두표(元斗杓)가 역관에게 밀령(密令)을 내려 사들여온 것입니다. 그러니 김근행은 나랏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

이른바 방위 산업에 관련된 일이어서 김근행이 민간의 소용인 척 사들여온 것인데 이때 논란의 대상이 되어 애꿎게 김근행(金謹行)이 경을 칠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정 대신들의 비호로 그는 무사히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김근행은 여러 번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유황사건이 있은 지 8년 후인 현종 14년(1673)에는 역관 한시열 등이 기밀을 누설한 죄가 어사에게 적발되어 국문을 받게 되었을 적에는 김근행도 같은 역관이라는 이유로 죄 없이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그는 작은 일에도 남의 주목을 받고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늘 조심하고 삼갔다.
2018-12-19 15:26:52
112.xxx.xxx.11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론광장
제목 닉네임 첨부 날짜 조회
옥천신문 게시판 운영원칙 (9)HOT옥천신문 - 2006-11-18 752421
노조? (3)HOT옥천사람 - 2023-04-06 4930
'불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누군가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 (11)HOT3자녀 아빠 파일첨부 2023-04-06 4585
옥천소방서 소방관 여러분 고생 하셨습니다 (1)HOT산불진화 - 2023-04-05 4413
아이들 불모 - 본인에 의해 삭제된 게시글 입니다.익명 - 2023-04-04 6
옥천중학교 노동탄압 교육 중단하고 사죄하라! (10)HOT나쁜어른들 - 2023-04-04 5419
RE 멀리감HOT와우 - 2023-04-08 4005
RE 옥중현수막 (24)HOT이요셉 파일첨부 2023-04-05 5132
RE 밥은줘야HOT아이엄마 - 2023-04-08 3897
국제종기 이전하고 옥천역세권 개발 하나요? (7)HOT군민 - 2023-04-02 5052
도랑에서 건진 박물관기사를 읽고.HOT - 2023-04-01 4062
2023충청권역 유물창고 예담고 성인 대상 교육프로그램 <지역민과 함께하는 충청권역 유물관리> 모집공고HOT예담고 파일첨부 2023-03-30 3836
세계의 시선 (7)HOT애국자 파일첨부 2023-03-25 4898
저수지, 추가 축조하고 하천 네트워크 구축하자! (3)HOT가뭄대책 - 2023-03-25 3824
대한민국의 미래 (2)HOT애국자 - 2023-03-23 4344
애국의 길 (6)HOT애국자 - 2023-03-22 4484
툭하면 그놈에 탄핵~~~지겹지도 않나?탄핵!!! (9)HOT하늘 - 2023-03-21 4375
옥천군청 보도자료 재미 있어서 올려봐요ㅋㅋ (2) - 본인에 의해 삭제된 게시글 입니다.익명 파일첨부 2023-03-18 52
(병원추행)기사가 참 편파적인듯...에 대한 답글 (6)HOT너는 거짓말을 하고있다. 병원 여직원 - 2023-03-18 5282
축산관련 옥천신문 기사를 읽고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이게 말이 되는지? (4)HOT축산관련 - 2023-03-15 4926
군수님 (15)HOT진보 좌파 - 2023-03-14 7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