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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광장
'정재수 군의 이야기'효자고개에 가슴뭉클, 뜨거운 눈시울이
 청산유수
 2018-12-07 23:29:36  |   조회: 602
첨부파일 : -
‘그의 뺨에 얼어붙은 눈물을 내려다보며 울은 것은 새파랗게 질린, 겨울 하늘의 별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부르지만 쓰러진 아버지는 끝내 귀를 열지 않는다.

누구 없어요? 살려 주세요! 아무리 소리쳐도 빈 메아리만 되돌아온다. 재수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덮어준다. 섣달 그믐의 강추위가 뼛속을 훑고 지나간다. 아버지, 아버지.....

눈보라 치는 컴컴한 고갯마루, 재수의 절규만이 하늘을 찢는다. 이젠 눈물마저 얼어붙었다. 재수는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포개 아버지를 안는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정재수 군의 이야기
*10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구하려다 숨진 정재수군은 1974년 1월 22일 아버지 정태희 씨와 함께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의 집에서 약 12km 떨어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에 있는 큰집으로 설을 지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큰집으로 가려면 보은군 마로면에 있는 험준한 고갯길인 마루목재를 건너야 했는데 당시 이 고갯길에는 이틀 전부터 내린 눈이 33cm 가량 쌓여 있었고, 기온도 영하 20℃까지 내려갔다 한다.

그 다음날 사람들은 고갯길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부자가 동사한 상태로 땅에 움츠리고 누워 있는데 아버지의 몸에는 아이의 외투가 덮여 있었고, 아이는 아버지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술기운이 있었던 아버지가 눈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아이가 옷을 덮어 주고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다가 지쳐 잠들어 결국 동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는 당시 여러 신문기사에 실려 전국으로 알려졌고, 후에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렸으며,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정재수군이 목숨을 잃은 고갯길인 마루목재에 묘가 만들어졌고, 1974년 묘 옆으로 정재수효행비가 세워졌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정재수군의 효행이 점점 잊혀져가자 지역의 뜻 있는 이들이 효자정재수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1993년 3월 폐교가 된 정재수군의 모교에 기념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효를 주제로 하는 효자 정재수 기념관을 경북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구 사산초등학교 (고 정재수 모교)에 건립하여 현대에 들어 잊혀져가고 있는; 사상을 재정립함과 아울러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살아있는 효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면적 278㎡의 영상관에서는 정재수군의 효행을 소재로 만든 영화를 비롯한 각종 영상물이 상영되고, 효 관련 토론장과 회의장으로도 활용된다.

2층에는 정재수군이 공부했던 2학년 1반 교실에 옛 교실의 모습이 복원되어 있다. 외부에는 1974년 건립된 동상과 추모비가 있다. 옛 운동장 자리에는 잔디가 깔려 있다.


'백제미' 고개로 불리워지던 곳 지금에 이르러서는 효자고개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효자고개에 얽힌 얘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개에 얽힌 사연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소개됐고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다. 
때는 1974년 섣달 그믐날인 1월22일, 설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때마침 중부지방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고
경상북도 상주군 하서면 사산초교 2학년에 다니던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 정태희씨의 고향이자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법화리 복우실 마을에 설을 쇠러 아버지를 따라 상주에서 보은군 마로면을 거쳐 밤길을 재촉했다. 
 
가던 도중 아버지는 어느 술집에 들러 술 한잔을  마셨고 그 술이 취한 가운데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길을 재촉했으나 결국 효자고개를 넘지 못한 채 고개 정상 부근에서 눈발을 헤매다가 부자가 얼어죽고 말았으니 이튿날 이들 부자의 시신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잡은 닭 한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갖고 있었고 아버지의 양복 윗도리로 덮은 채 꼭 끌어안고 죽어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정재수 군의 아버지 정태희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마을 육창수(58)씨가 다음날 눈밭 속에서 정재수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며 느꼈던 안타까움을 다시 털어놓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정재수 효자의 효행이 난세까지라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 효행의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효자비와 효자고개를 재정비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효자고개 주변의 농토에서 일을 하던 이 마을 주민들이 96년 봄쯤 상주시에서 정재수 효자비를 재정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곳으로 답사나온 일단의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시.군간 협의를 통해서라도 효자고개 및 효자비 재정비 계획은 하루빨리 추진되어야 한다는게 주민들의 일치된 생각이다.
 
주민들은 또 효자고개가 군도로 승격된 이상 확포장을 서둘러 보은쪽 6개 마을 4백50여 가구의 생활권을 청산으로 끌어들일 경우 면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또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방안으로도 꼽히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법화리 주민들만의 작은 숙원이 아니라 청산면 전체 주민들에 해당되는 커다란 숙원인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리는 본래 예곡리에 속해 있었다. 근세인 1890년의 기록에는 청산현 북면 예곡리였고, 그후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청산현의 일부 면을 합해 청산면으로 만들고 옥천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예곡리에서 분리해 법화리로 분리되었다.  법화리라고 부르게 된 것은 복우실, 또는 버구실의 법자와 화동을 조합해 만들었으면 지명의 유래에 대해 정확히 증언하는 주민이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법화리 주민들은 주민화합 및 단합이라면 특별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을 정도로 하나된 힘을 과시한다. 지난 91년 삼방리에서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1.3km의 진입로를 주민자체 공사로 출향인들과 더불어 손수 시멘트를 비벼넣고 지게질을 해가면 억척같이 완공을 해냈는가 하면 94년에는 번듯한 마을회관을 건축해 숙원의 하나를 풀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출향인들과의 관계도 여는 마을 못지않게 원활하다.
 
'잘사는 사람, 빽 있는 사람'은 없어도 마을의 궂은 일에는 언제든디 발벗고 나서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음은 주민들의 가장 큰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이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고향진목회'의 구성도 이들에게는 큰힘이 되고 있다.   현재 주민들의 가장 큰 소득 작목은 다름아닌 인삼. 마을에 사는 농가치고 90% 이상이 인삼 경작농가이다. 옛부터 만월리와 함계 청산면내 최대 보리 생산지였던 이 마을이 인삼으로 소득작목이 바뀐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쯤.
 
보리는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오다 올들어 1농가만이 재배하고 있는데 이 마을이 95년까지는 군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우리밀 재배단지였음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93년부터 시작된 우리밀 제배는 기본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확하는 데에 따르면 어려움 등으로 올해의 경우 마을에서 단 한농가만이 재배하고 있을 따름이다.  효자고개를 넘어 속리산을 갔고 속리산을 통해 소백산을 거쳐 태백 준령으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던 곳에 위치한 마을은 주민들의 화합속에 풍년들녘으로 변하고 있었다.
 

옥천 김용준 효자비각
옥천 김상기 효자비각
김상기 효자는 아홉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두부를 잘못 먹고 체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평생동안 두부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홉살 때라면 부모 앞에서 마냥 재롱을 떨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두부를 안먹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얼마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였고 새어머니는 성질이 괴팍하여 집안이 불안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내보내려고 했는데 이를 본 김효자는 새어머니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탓이라 얘기하며, 앞으로는 친어머니같이 대할 것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만류하여 서모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한다.
이를 본 새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넓은 아량에 감동하여 아들에게 사랑을 쏟게 되었으며 이로써 가정의 행복을 되찾았고 김효자 또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어느 때는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신음하게 되었는데 매일 강을 나가 잉어를 잡아 고아 드려, 정성이 지극했음인지 병도 쉽게 나았고 몸도 건강해져 천수를 다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 집안사람이나 마을의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게 되니 그의 착한 품성과 효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려하게 된 것이다. 

효자를 울린 신기한 바위

성북동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그것을 팔아 부모님을 봉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를 베던 젊은이가 배가 고파서 도끼질을 하는 것조차 힘이 들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끼를 내려놓고 곁에 있는 바위에 기대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도끼질도 못하겠군."

젊은이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부모님도 지금쯤은 허기가 지셨을 텐데…… ."

그는 말끝을 줄이며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쓸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렀습니다. 무언가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젊은이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다람쥐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젊은이는 자기가 기대어 앉은 바위를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젊은이는 그만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기가 기대어 앉아 있는 바위에서 쌀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얼른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펴서 쌀을 받았습니다. 쌀알은 수건에 도르륵 굴러 떨어졌습니다.

흰쌀은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바위에서는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야, 쌀이다! 쌀!"

젊은이는 기뻐하며 나뭇짐이랑 도끼를 내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지었습니다. 젊은이가 구해온 쌀로 세 식구는 오랜만에 배부르게 밥을 먹었습니다.

'아, 정말 잘 먹었다.'

젊은이가 흡족해하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쌀바위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무가 잘 팔리지 않아 부모님이 며칠 동안 밥도 못 드시고 굶고 계셨는데, 쌀 바위 덕에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이제 나무를 벨 생각도 않고 하루 종일 쌀바위 옆에 앉아 쌀이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쌀바위는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때마다 세 식구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젊은이와 그 부모는 쌀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하루 세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이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젊은이는 쌀자루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쌀바위에서 나오는 쌀을 자루에 가득 채워 내려오면 매일매일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쌀을 내다 팔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젊은이가 서둘러 산에 올랐습니다. 아침에 한 되 그리고 저녁 때 또 한 되 그렇게 쌀을 받는 재미에 젊은이는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젊은이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버티고 서서 쌀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하다보니 욕심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이젠 집에 돌아갈 생각도 없이 쌀바위 앞에서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습니다.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님 생각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저 쌀이 많이 나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에이, 뭐 좋은 수가 없나!"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젊은이는 가지고 간 자루 두 개에 쌀이 가득 찰 때까지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보내고 두 자루 가득 쌀이 담기자 젊은이가 휘파람을 불려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왔어요."

신이 난 젊은이는 쌀자루를 마루에 올려놓으며 부모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순간 젊은이는 방안의 광경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젊은이가 쌀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늙으신 부모님은 그만 굶어 죽고 만 것입니다.

"아, 이를 어쩌면 좋아!"

젊은이는 땅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후 쌀바위에서는 쌀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2018-12-07 23:29:36
211.xxx.xxx.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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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사상 2018-12-14 00:18:07 119.xxx.xxx.37
옥천(불길 속에서 어머니를 구하려다 죽은 지악지 효자문) 집에 불이 났는데 집이 초가집이라 금시 집 전체가 불덩이가 되어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 들어 업고 뛰어 나오다 불꽃이 너무 세어 둘이 죽고 말았다.
천성욱 효자비, 조완기 효자문, 박인 효자문, 손대창 효자문, 김영복 효자문, 김상기 효자문, 김경탁 효자비각, 오필열 효자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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